[티브이데일리 최하나 기자] 코로나19가 끝난 지 수년이 지났지만 한국 영화 시장은 팬데믹 이전의 활력을 여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연간 누적 관객 수는 1억 명을 겨우 넘기는 수준에서 정체돼 있으며, 한때 업계의 기준처럼 여겨졌던 2억 관객 시대는 이제 과거의 수치로 남았다. 시장은 일시적 침체가 아닌 구조적 변곡점에 와 있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지난 7월 열린 제29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도 한국 영화 산업의 위기는 핵심 화두였다. ‘죽거나 부활하거나’ GV에는 외유내강 강혜정 대표, ‘장손’ 오정민 감독, 하하필름스 이하영 대표, 영화관산업협회 신한식 본부장, ‘AI 시대 영상정책 특별위원회’ 조영신 위원장이 참석해 생태계 붕괴의 원인을 놓고 심도 있는 토론을 펼쳤다. 이하영 대표는 “팬데믹 이후 관객이 줄자 신규 투자가 감소했고, 제작이 멈추면서 다시 관객 수가 떨어지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강력한 산업이라고 생각했지만 한국 영화계는 의외로 맷집이 약했다”고 말했다.

이어 “호황기일 때 장르의 다변화를 이루지 못하고 수익만 좇다가 모두가 하청 구조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신한식 본부장은 “영화관은 어쩔 수 없는 경쟁 체제 안에 있다. 다양성을 확보할 여건이 되지 못한다”며 팬데믹 이후 극장의 경영 취약성이 그대로 드러났다고 평가했다.

이들의 진단을 정리하면 지금의 한국 영화 위기는 단일 요인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합적 침체에 가깝다. 업계에서는 팬데믹 이전부터 누적되어온 리스크가 코로나19를 거치며 한꺼번에 드러났고, 제작·투자·배급·상영이라는 네 축이 동시에 흔들리는 구조적 문제라는 데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즉, 특정 단계의 실패가 아니라 산업 전체의 균열이 한꺼번에 드러난 ‘시스템 리스크’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 같은 진단은 올해 한국 영화 성적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올해 최고 흥행작은 영화 ‘좀비딸’로 563만 명에 그쳤고, 박찬욱 감독의 신작으로 기대를 모았던 ‘어쩔수가없다’는 294만 명으로 손익분기점을 간신히 넘겼다. 여름 시장을 겨냥한 제작비 300억 원대 대작 ‘전지적 독자 시점’ 역시 106만 명에 머물며 손익분기점에 크게 미달했다. 산업 전반의 기반이 동시에 흔들린 결과, 흥행 축이 사실상 비어 있는 한 해가 되었다는 방증이다.

배급사들은 이 위기의 출발점을 “변화의 동시 충돌”로 보고 있다. 배급사 관계자 A씨는 “2억 관객 시대에도 국내 시장 확장의 한계는 분명했다. 팬데믹이 닥치면서 극장이 멈추고, 투자가 중단되고, 제작진이 OTT로 이동하며 공급 기반이 무너졌다”고 설명했다. 그는 “콘텐츠가 줄자 투자도 줄고, 투자가 줄자 다시 콘텐츠가 사라지는 악순환이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팬데믹이 단기간 충격이 아니라 산업 체질의 약점을 가속해 드러낸 ‘증폭기’였다는 해석에 힘이 실리는 지점이다.

소비 방식의 변화는 이런 악순환에 속도를 붙였다. A 관계자는 “올해 일본 애니메이션 흥행은 N차 관람·굿즈·특수관 중심의 팬덤 소비가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았다는 신호”라며 “한국 실사 영화는 이 기반이 취약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제 영화관은 기본 옵션이 아니라 목적지가 됐다. 재미가 확실하지 않으면 가지 않는 시대”라고 말했다. 관객 선택의 기준이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정교해졌다는 의미다.

패키징 시스템 붕괴 역시 배급사들이 꼽는 중요한 전환점이다. 다른 배급사 관계자 B씨는 “OTT 시대 이후 관객의 선택 기준이 세분화되면서 과거의 배우·감독·제작사 패키징 방식은 더 이상 흥행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는 “시나리오 물량은 들어오지만 실제 투자로 이어지는 경우가 크게 줄었다”고 말했다. 브랜드 중심 소비가 약해지면서 ‘이름값만으로 통하던 시장’ 구조가 사실상 무너졌다는 뜻이다.

제작과 투자 역시 시간 구조상 회복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B 관계자는 “영화는 기획부터 개봉까지 최소 2년, 길게는 5년이 걸린다. 단 1년의 투자 공백이 몇 년 후 공급 공백으로 돌아오는 산업적 구조가 위기를 더 깊게 만든다”고 말했다. 팬데믹기의 투자 중단은 지금의 수급 불균형으로 직결되고 있다. 투자 공백이 곧 창작 생태계의 연쇄적 공백으로 이어지는 구조적 취약성이 다시 한번 드러난 셈이다.

배급사들은 극장 운영이 회복세를 늦춘 요인 중 하나로 보고 있다. B 관계자는 “극장이 재투자를 줄이고 티켓값 인상을 택한 것은 관객을 다시 불러오기 어려운 결정이었다. 서비스 개선이나 관람 경험 확장 같은 구체적 변화가 필요했지만 뚜렷한 움직임은 적었다”고 말했다. 관객이 체감하는 ‘극장 경험’이 팬데믹 이후 크게 변했음에도 극장 스스로 이에 대응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극장 측은 이러한 지적에 대해 “상황의 단순화”라며 반박했다. 멀티플렉스 관계자 C씨는 “티켓값 인상이 영향을 아예 안 미친 건 아니지만 마지막 인상이 2022년이다. 지금의 관객 감소를 가격 요인으로만 설명하는 건 무리”라고 말했다. 그는 “여가 선택지가 크게 확장됐고, OTT 퀄리티도 높아져 극장을 ‘굳이’ 찾아야 할 이유가 줄었다”고 설명했다. 즉, 관객의 이탈은 가격보다는 ‘경쟁 구도 변화’의 영향을 더 크게 받고 있다는 것이다.

C 관계자는 “야구·러닝·캠핑처럼 활동적 여가가 주류가 됐고, 시간과 비용을 들여 극장에 왔는데 영화가 기대에 못 미치면 평가가 훨씬 냉정해졌다”고 말했다. 팬데믹을 거치며 관객은 더욱 선택적이고 보수적인 소비자가 됐다. 단순한 취향의 변화가 아니라 기준의 고도화다.

상영 편성 논란에서도 극장 측은 억울함을 드러냈다. C 관계자는 “회차 배분은 사전 인지도·예약률 등 내부 데이터를 기준으로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스크린 몰아주기라는 오해가 반복된다”고 말했다. 극장 입장에서는 ‘예측 가능한 수요에 기반한 편성’이지만, 산업 전반의 신뢰가 약해지면서 이 판단 역시 부정적으로 소비되고 있다.

극장 입장에서 올해 가장 뼈아픈 지점은 연말 시장 한국 텐트폴의 부재다. 텐트폴의 부재는 극장 회복뿐 아니라 산업 전체의 건강성을 판단하는 중요한 지표다. C 관계자는 연말 한국 텐트폴 영화의 부재를 지적하며 “연말엔 글로벌 텐트폴이 여럿 있지만 한국 텐트폴은 없다. 특정 영화를 보고 싶지 않은 관객도 선택지가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텐트폴이 빠지면 극장 전체의 ‘연간 볼륨’이 줄어들기 때문에, 이 공백은 산업의 체감 위기를 더욱 크게 만든다.

극장 경험 자체가 달라졌다는 지적에 대해 그는 “키오스크·무인화는 영화관만의 특징이 아니라 유통업 전반의 흐름이다. 주요 지점에서는 여전히 검표를 하고 있다”며 오해를 바로잡았다. 팬데믹 이후 인력 효율화 흐름이 가속화되면서 경험의 질에 대한 논쟁은 지속되고 있다. 관객이 체감하는 ‘영화관의 의미’가 변하는 시기인 만큼, 극장과 관객 간의 기대 간극도 넓어진 모습이다.

C 관계자는 현재 상황을 “연간 1억 명이 새로운 기준값이 된 ‘뉴노멀 시대’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2024년도 좋지 않았고 올해는 더 어렵다. 그러나 관객은 여전히 보고 싶은 작품이 있으면 극장에 온다. 취향이 세분화됐을 뿐 관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결국 문제는 ‘관객이 선택할 만한 한국 영화가 얼마나 존재하느냐’로 귀결된다.

실제로 최근 개봉한 ‘주토피아2’가 개봉 5일 만에 200만 관객을 돌파하며 극장가에 뚜렷한 반등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관객이 확실한 기대를 가진 작품 앞에서는 여전히 극장으로 움직인다는 대표적인 사례다. 반면 한국 실사 영화는 올해 이렇다 할 텐트폴이 부재해 같은 파급력을 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산업계가 우려하는 지점이다.

C 관계자는 “10대·20대는 굿즈와 브랜드 경험 중심으로 극장을 소비한다. 지금은 체질 개선을 거치는 과도기이자 바닥을 다지는 시기”라고 강조했다. 결국 한국 영화는 “관객이 다시 발걸음을 옮기고 싶을 만큼의 콘텐츠와 경험을 어떤 속도로 만들어낼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 서 있으며, 그 해답이 산업의 다음 10년을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티브이데일리 최하나 기자 news@tvdaily.co.kr/사진=각 영화 포스터,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