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김한길 기자] '풍문으로 들었소'는 제왕적 권력을 누리며 부와 혈통의 세습을 꿈꾸는 대한민국 초일류 상류층의 속물의식을 통렬한 풍자로 꼬집는 블랙코미디로 배우 길해연은 한정호(유준상)의 업무비서이자 서열 1위 충복인 양재화 역을 맡았다. 극 중 시선을 사로잡는 반백이 된 머리를 단정히 빗어 넘기며 차분한 어조로 카리스마를 발산하지만 실제로 그는 강렬한 인상과는 달리 부드럽고 겸손한 배우였다.
'풍문으로 들었소'는 회를 거듭할수록 갑(甲)과 을(乙)의 관계를 진지하거나 우스꽝스럽게 표현해내며 시청자들의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이에 길해연은 "확실히 드라마 자체를 사랑해주시는 분들이 많다 보니 나 또한 어딜 가도 많이들 알아봐 주신다. 세수도 안 하고 모자를 쓰고 밖에 나가도 주위 분들이 먼저 인사를 건넨다. 매우 신기하다"고 아이 같은 순수한 미소를 보였다.
길해연은 이번 '풍문으로 들었소'를 통해 다시 한 번 안판석 감독, 정성주 작가와 함께했다. 이제는 두 콤비의 감초 같은 배우로 꼽힌다. 길해연은 "정성주 작가의 필력은 굉장히 깊다. 단어 하나하나가 가진 의미가 가벼운 것이 없다. 그냥 나불나불해서 될 일이 아니다. 그래서 오히려 죄송스러울 때가 있다. '내가 이 정도 표현하는 게 맞는 건지' '의미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내가 이것밖에 안 되나' 이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집에 가면 늘 반성하며 곱씹어본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세상에 대한 다른 것을 제시를 하시는 용감하신 분이다. 충분히 자신이 가진 것을 안주할 수 있는데 끊임없이 도전을 하고 언제나 한 단계 앞서서 '여기 좀 봐'를 외치시는 분"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안판석 감독에 대해서는 "참 존경하는 분"이라며 "촬영장에서는 연기에 대한 지적이나 요구가 거의 없다. 알아서 하도록 자유롭게 맡겨준다. 하지만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들고 싶은 생각은 한결같다. 그분이 가진 생각을 같이 공유하고 싶다. 그래서 '이래야 되지 않을까?'라면서 계속 무엇이 잘못됐는지 고민해본다. 하지만 감독님은 무조건 '어이구. 잘한다'라고 툭 내뱉으신다. 영혼이 없는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이내 "그분이 꿈꾸는 세계에 같이 동참하고 싶다. 감독의 입장에서는 전체를 보기 때문에 속 터지는 일이 많을 텐데 연기자가 자신의 색에 맞게 표현하도록 존중을 해준다"고 칭찬했다.
길해연은 극 중 비서나 하인 등의 을과 어울리지만, 그렇다고 을편에 서지는 않는다. 자신의 부당한 대우에 적극적으로 갑과 맞서는 최연희(유호정)의 개인 비서 이선숙(서정연)과는 대조적이다. 이에 대해 그는 "양재화라는 인물은 누구의 편도 아니면서 누구의 편이기도 하다. 약간 이분법적이다. 양재화 입장에서 보면 '옳다'고 주장하면 안 되는 것들이 있다. 쫓겨날 뿐"이라고 양재화의 입장을 대변했다.
"어쩌면 현재의 삶을 사는 사람들 중에 가장 보편적인 인물이 아닐까요? 막 정의로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난 ‘악(惡)’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 같아요. 때론 중재도 하면서 이편도 들어줬다가 저편도 들어주는 그런 삶을 사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호락하지 않은 세상을 수습하면서 내 삶도 안전하게 보존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죠."
길해연은 드라마 내에서는 비치지 않았던 양재화의 고충도 털어놨다. 그는 "비천한 신분으로 거대한 삶에 적응하기 위해 양재화 역시 얼마나 많은 것들과 경쟁하며 치열하게 살아왔을까 생각이 든다. 누구보다 성실하고 노력했을 것"이라며 "마냥 무능력하게 심부름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삶에는 조심스러움이 있었을 것이다. 이것을 보존하면서 을과 나눠 갖기도 하고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그의 신념"이라고 밝혔다.
또한 그는 "그렇게 평생을 남과 딜을 하면서 살아온 양재화가 어느 순간 그것들이 부질없다고 생각되면 그도 역시 다른 반역을 꿈꿀 것이다.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양쪽 카드를 가지고 있다는 건 양재화가 가진 특권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갈림길에 섰을 때 어느 카드를 버릴 건지가 중요하다. 마지막 수를 어디에 둘지 기대해달라"고 앞으로 이어질 극의 전개를 조심스레 설명했다.
길해연은 양재화라는 인물이 우리네 슬픈 현실과 닮은 점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어쩌면 우리 모두 그렇게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건 비겁한 게 아니다. 어떻게 내 감정을 다 드러내고 사느냐. 타인을 생각하면 이미 한편에서는 다 희생자다. 사회적 구조에서 계속 남의 눈치를 보고 남 뒤치다꺼리며 사는 모습이 자유롭지 못한 현실과 닮아 있다. 과연 편하게 앉아서 커피 한 잔 마실 시간이 있었을까 싶다"고 털어놨다.
길해연은 대중들에게 '카멜레온 같은 배우'로 남겨지길 원했다. '뭐 하나만 잘하는 배우'가 아닌 '이것도 저것도 잘하는 배우'이고 싶다는 게 이유다. 그는 "'풍문으로 들었소'를 통해 양재화라는 비서를 역할을 소화했다. 그리고 언제가 다른 작품을 통해 비서라는 직업을 또 소화할지도 모른다. 분명한 건 같은 비서라도 시청자가 느끼는 분위기는 분명 다를 것"이라면서 "배우란 끊임없이 변화하며 그것을 녹여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극단 경력 30년인 길해연은 "아직도 연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이에 복습하고 또 복습한다며 자기 계발을 한다는 길해연. 이는 연기를 사랑하고 배우로서 자부심을 가진 길해연의 열정에서 나오는 모습이 아닐까.
"숨을 고르고 하반기에 다른 더 좋은 작품으로 다시 찾아뵐게요. 길해연이라는 배우에 대해 낯선 시각이 많으셨을 텐데 이렇게 많은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하고, 기회가 된다면 한분 한분씩 만나 90도로 감사인사를 전하고 싶네요. 항상 안주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노력파 배우가 되겠습니다."
[티브이데일리 김한길 기자 news@tvdaily.co.kr / 사진=권영민 기자]